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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나홀로 추천 코스

[전남 진도군][나홀로 추천 코스] 고려와 조선의 역사 현장을 가다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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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역사 현장을 가다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 아래는 울돌목이라 불리는 물살이 센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이 펼쳐졌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녹진전망대에 올라 명량을 내려다보고, 벽파진에 올라 이충무공 전첩비도 둘러보는 역사테마코스다. 또한 고려시대 삼별초의 근거지로 용장성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32.7km
- 코스 일정 : 기타
- 코스 총 소요시간 : 6.5시간
- 코스 테마 : ----지자체-----


 




쌍계사

신라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이 절은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이름하였다.사찰 뒷계곡을 따라 10분 여를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107호인 50여 수종의 상록수림 12,231m²이 우거져 있다. 쌍계사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1982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연대가 강희 36년, 즉 숙종 23년이란 기록이 나와 정확히 1697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약 1m의 높이인 자연석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건물은 정면 삼칸, 측면 이칸의 맞배지붕의 다포계양식이다.중앙문은 사분합(四分閤)이며 양문은 3분합문(三分閤門)인데 양편의 문은 대살문이고 중앙문은 빗살문이다. 공포는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포작하였으며,출목수(出目數)는 내외가 공히 삼출목(三出目)이다. 여기에서 특징있는 것은 참자 형식이 마치 석탑이나 부도의 기단부의 안성에서 보인 장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도리의 내·외목도와 중도리 및 종도리를 설치하는데 고주를 양편에 세우고 우물 천정을 가구하였으며 대들보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진도 쌍계사(2)

진도 쌍계사(5)

진도 쌍계사(7)

진도 쌍계사(7)

진도 쌍계사(8)

진도 쌍계사(10)

진도 쌍계사(11)

진도 쌍계사(15)

진도 쌍계사(17)

진도 쌍계사(6)

진도 쌍계사(9)

진도 쌍계사(12)

진도 쌍계사(13)

진도 쌍계사(14)

전남_진도_참, 진도스러운 첨찰산02





녹진전망대

녹진전망대

진도타워는 진도대교 근처에 있는 망금산 정상에 위치한다.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등에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타워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군 관광의 랜드 마크로 군민들에게 자긍심을, 진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남_진도_진도 울돌목05

가을여행주간_목포는 밤에 빛나고, 진도는 밤에 낭랑하여라!_진도 진도타워01

가을여행주간_목포는 밤에 빛나고, 진도는 밤에 낭랑하여라!_진도 진도타워02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충무공벽파진전첩비_02

- 홈페이지 : https://www.jindo.go.kr/tour/main.cs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를 찾아가는 길은 예전에 광주, 나주, 영암, 해남을 거쳐 돌아가야 했으나, 지금은 목포에서 해남읍내를 거치지 않고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가로질러 진도에 갈 수 있게끔 길이 단축되었다. 유인도 45개와 무인도 185개로 이뤄진 진도의 호국 전적지로는 섬 동북쪽에 들어선 벽파진의 이충무공전첩비와 용장산성, 그리고 남쪽의 남도석성이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 읍내로 가다보면 군내면 세등리를 지나 용장산성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를 따라 좌회전,1.7km를 가면 용장산성 입구인데, 벽파진은 이 곳에서 계속 바다를 향해 3.5km 가량 간다.

벽파진은 옛날부터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로 명량해협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바다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땅이다. 포구 뒷편 암산에 오르면 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195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이 싯귀가 벽파진의 이충무공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전첩비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 비를 세운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정유재란때 이순신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3백여 척의 왜선을 섬멸, 유명한 명량대첩(1597)을 거둔다.

벽파진은 바로 그 명량대첩을 거두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가 나온다. 용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곳에서 몽고군에 맞서 싸우다 남도석성으로 밀려가고 끝내는 제주도로 건너간다.벽파진은 지금도 항구로서의 기능을 발휘,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가 하루에 한번씩 기항한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_01

충무공벽파진전첩비_03

충무공벽파진전첩비_05





진도 용장성

용장산성

-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고려 원종 때에 몽고 항쟁 중에 왕실이 몽고에 굴복하자 삼별초는 끝까지 저항했다.배중손 장군은 몽고군에게 쫓기어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와 새 나라를 세웠다. 그는 한동안 본토 일부와 제주도까지 세력권에 넣는 등의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고 말았다. 그때 삼별초가 항쟁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이다. 용장산을 두르고 있는 성이 용장산성인데 주로 석성이지만 부분적으로는 토성이 섞인 곳도 있다. 이 안에 있는 용장성은 몽고에 무릎을 꿇은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여연합군에게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하후 온을 새왕으로 받들고 관부를 구성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몽고에게 항복한 고려 조정에 대립, 정권을 세운 뒤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인원 등을 싣고 진도 벽파진에 도착, 용장성에 터를 잡을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고 각종 건물을 지어 왕을 황제로 칭하였다.

오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왜에 국서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하고 섬이 크고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두어진 조세를 개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할 이동로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을 차단 당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은 정부는 몽고와 손잡고 진도를 몇 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려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은 다시 진도를 공격, 10여일 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과 배중손은 죽음을 당하고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간다. 제주도로 건너간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는 3년간의 항쟁 끝에 원종13년(1273) 2월에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지금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궁궐터가 거의 복원되었고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 자리 12개가 남아 있으며, 그 주변에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남아 있다. 진도읍에서 의신면 돈지 가는 길로 운림산방 못 미쳐 여몽연합군에게 쫓겨 죽음을 당한 삼별초의 왕온의 무덤이 왕무덤재에 있다.

* 면적 : 산성 일원(6,026평)
* 시대 : 고려 시대

용장산성

용장산성

용장산성

용장산성

용장산성

진도 용장성

진도 용장성

진도 용장성





점심식사(사랑방, 제진관)

전남 진도군_사랑방식당01

- 전화번호 : 061-544-4117
전남 진도 서천의 청룡에서 갓잡아온 신선하고 통통한 간재미와 바지락을 회를 쳐 향긋한 미나리와 버무린 간재미무침과 바지락무침이 바로 이집의 주메뉴이다. 미나리를 듬뿍 넣고 새콤 달콤하게 무쳐 비리지 않고 육질이 담백하다. 이 집만의 집 식초를 사용하는 것이 생선 살의 육질을 탱글하게 하며 맛을 내는 비결이라고 한다. 단백질, 비타민, 미넬랄 등의 영양도 풍부해 몸에 좋다. 뭐니 뭐니 해도 술안주로 이만한 것이 없을 듯 싶다. 거기다 전어회나 계절음식인 논고동회 등은 이집의 자랑인 간재미탕과 함께 깔끔하고 맛이 있어 인기가 좋다.




진도 운림산방

운림산방_09

- 홈페이지 : http://tour.jindo.go.kr
http://www.cha.go.kr
서화 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대표적인 서화 예술가로 꼽히는 분은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다. 그는 당나라 남송화와 수묵 산수화의 효시인 왕유의 이름을 따 허유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운림산방은 허련이 말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 곳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다. 진도읍에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첨찰산 서쪽,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과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 새로 지어진 기념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운림산 방 앞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배롱나무가 있다. 소치 허련선생은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이다.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30대 초반 그의 소개로 서울로 가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아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여러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했다.

이 곳은 또한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기도 하고, 한 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이 그림을 익힌 곳으로, 한국 남화의 성지로 불린다. 오랫동안 방치되던 것이 1982년 손자 허건에 의해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고,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이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485m의 첨찰산 봉우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운림산방은 사랑채, 화실, 1586.78m²(480평)의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이 있다. 입구의 암벽과 가까운 거리에 쌍계사가 있고, 뒤 첨찰산 서쪽 기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있다.

운림산방

운림산방

운림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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