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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나홀로 추천 코스

[서울][나홀로 추천 코스] 동대문 주변에서 만나는 역사의 현장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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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주변에서 만나는 역사의 현장

우리나라 보물인 동대문.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양성곽길이 북쪽으로 이어져 있고, 동대문운동장과 패션시장으로 우뚝 선 동대문 중심의 상권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7km
- 코스 총 소요시간 : 6시간


 




운현궁

운현궁

- 홈페이지 : http://www.unhyeongung.or.kr
운현궁은 현재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사적의 문화유산이다. 운현궁은 경복궁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왕족의 친족들이 거주하던 곳을 궁(宮)으로 부른 것 중의 하나이다. 궁(宮)은 생활의 공간이며 궐(闕)은 정치의 공간으로서 경복궁이 정치와 궁중생활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었다면, 운현궁은 왕족의 친족인 흥선대원군의 일가가 거주하고 생활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운현궁은 조선조 말기의 역사적 사건들 대부분이 시작된 곳이며 수많은 개혁정책과 쇄국정책이 시행된 곳이었기에 그 역사적 상징성은 남다르다고 하겠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였으며,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 즉 임금이 되기 전까지 출생, 성장한 곳이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 때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는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고 흥선군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고종이 즉위한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 노안당과 노락당의 준공을 보았다.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구 TBC방속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전해진다.

운현궁의 대표적인 건물은 고종 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안당과 노락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때 주로 이용되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유폐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말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 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이로당은 노락당 옆에 있는 안채로서 구조가 "口"자형으로 되어 있고 그 내부 가운데에 정원이 있는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謹門), 공근문(恭勤門) 등이 있었으며,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경근문의 기초만 남아있다.

운현궁의 규모와 구조가 이와 같이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은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가 하야한 후 고종 18년(1882), 청의 정부에 피납되어 있는 3년여 동안 운현궁의 재정은 매우 궁핍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운현궁의 위용도 퇴락해졌으며 대원군이 타계한 다음은 그 유지관리가 매우 어려워졌다.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1845~1912)이 관리할 때, 고종이 내탕금 270만냥과 쌀 370석을 하사하여 운현궁을 수리하고 밀렸던 빚을 갚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1991년 대원군의 5대손 이청(1936~)씨가 서울특별시에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특별시에서 매입하였고 1993년 11월부터 운현궁에 대한 보수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종묘

종묘

- 홈페이지 : 종로 문화관광 http://tour.jongno.go.kr/
문화재청 종묘 http://jm.cha.go.kr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56,500평의 경내에 종묘정전을 비롯,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어숙실, 향대청, 신당 등의 건물이 있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역대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왕조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의 으뜸가는 행사이자 통치질서의 기본이었다. 종묘는 중국에서 비롯된 제도로 왕조시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예제(禮制)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조는 종묘를 가장 중요한 제사 대상으로 삼았고 그 건축과 조경에도 궁궐에 버금가는 정성을 쏟았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뒤 경복궁과 동시에 세운 곳이 종묘였다. 그만큼 새 왕조에게 있어 종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종묘는 궁궐의 동쪽에 지어야 한다는 중국의 제도를 본따 경복궁의 동쪽에 세웠다. 그러나 종묘는 우리 현실에 맞게 수용되면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단순한 구조의 재실을 길게 연결해 장엄한 엄숙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잡다한 장식을 일체 곁들이지 않은 최소한의 공간 구성으로 제사공간이 갖는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되도록 만들었다. 종묘제례는 1975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는 1995년 12월 9일에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고와 함께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현재 종묘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 정전묘정 공신당에 83위의 신위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종묘에서 베풀어지는 제사 의식을 종묘제례라 부른다. 이 의식은 조선시대에는 춘하추동의 첫 달과 그해 12월 섣달에 대제를 올렸는데, 일제 때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전화:765-2124)" 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대제를 올리고 있다. 각 제사 의례에 맞추어 음악과 무용이 곁들여져 경건한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키는데 이를 종묘제례악이라고 한다. 종묘의 뛰어난 건축미와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음악으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있는 고전음악이다. 우리 고유의 음률을 통해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이 종묘제례악은 국립국악원이 전수하였으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점심식사(서울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 진원조 보신닭한마리)

- 홈페이지 : http://tour.jongno.go.kr
의류 상가가 꽉꽉 들어찬 빌딩들이 즐비한 동대문, 이제는 아시아 최대의 의류상가 지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곳이 동대문 주변 지역이다. 이곳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뒤에는 동대문 원단시장, 평화시장과 인근에 자리잡은 시장 사람들이 있었다. 30여 년 전 그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마음을 녹여주던 곳이 지금의 닭한마리 골목이었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8, 9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다가 기업은행 건물을 끼고 좌회전 하면 일방통행길이다. 그 길 오른쪽에는 오늘도 동대문 종합시장과 인근 시장으로 드나드는 물품을 나르는 택배오토바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길 중간 쯤 오른쪽에 보면 덕성각이라는 중국요리집이 보이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닭한마리집들이 나온다.

그 골목 닭한마리집들은 짧게는 5년부터 길게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식당이 있기 전 개인집에서 닭칼국수를 팔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골목 닭한마리집의 역사는 30년 보다 훨씬 더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당시 닭칼국수를 팔던 할머니집을 28년 전에 인수해서 지금까지 '닭한마리'를 팔던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할머니 한 분이 지금의 '닭한마리'식의 요리가 아니라 닭고기를 넣고 칼국수를 끓여 팔았다고 한다. 기와 얹은 한옥집 마루와 방에서 손님을 받았다. 지금의 사장은 그 집을 고스란히 인수해서 당시 마당이었던 곳에 홀을 만들고 식탁을 놓았다. 지금 남아 있는 집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집은 '진옥화 닭한마리'이다. 그러나 식당에 불이 났고 2009년 2월 재건축 하였다.

이 집 또한 처음에는 지금의 '닭한마리'식의 요리가 아니라 '닭칼국수'를 팔았다. 그러니까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 요리의 원조는 닭칼국수인 셈이다. 지금도 이 골목 식당 간판이나 현관, 유리창에는'닭칼국수'라는 단어가 남아 있다. 또한 '닭한마리'와 곁들여 먹는 메뉴에 칼국수 사리가 남아 있는 것도 그 증거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칼국수에 닭고기가 들어간 것에서 닭한마리를 육수에 넣고 끓이는 닭요리에 칼국수가 부재료로 들어가는, 주객이 전도된 요리이기도 하다. '닭한마리' 요리는 집집마다 거의 비슷하다. 다른 게 있다면 닭고기를 찍어먹는 소스의 맛과 육수, 선택해 넣어 먹을 수 있는 부재료 등이다. 그래서 이골목 집집마다 소스와 육수의 비빔을 반만 공개한다. 나머지는 비밀이란다. 소스의 주재료인 고춧가루가 좋아야 한다. 맵기만한 고춧가루가 아니라 매우면서도 풍부한 미감과 감칠맛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또한, 육수에 들어가는 재료도 엄나무, 인삼 등 집 마다 다르다. 큰 양푼에 육수 가득 붓고 그 속에서 닭한마리를 통째로 끓인다. 닭은 살짝 삶아서 나오지만 식탁 위 간이 가스렌지 위에서도 푹 끓이는 게 좋다. 왜냐하면 감자와 떡, 인삼, 대추, 버섯 등 부재료들의 맛이 우러나 뒤엉켜 한 맛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끓고 나면 고기와 부재료를 건저 먹은 뒤 남은 육수에 칼국수 사리를 넣어 끓여 먹는 것으로 닭한마리의 만찬은 끝난다. 지금도 이 골목 단골의 반 이상이 동대문 주변 시장 사람들이다. 소문이 일본까지 퍼져 일본 여행자들도 꽤 많이 찾는다. 또한, 맛골목을 좋아하는 젊은 연인들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팔품을 팔아 이 골목을 찾는다. 그들의 입맛에 30년 전 '닭한마리'요리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홈페이지 : DDP http://www.ddp.or.kr
VISITSEOUL http://www.visitseoul.net

공원 내에는 서울성곽과 이간수문(265m 8,030㎡)외에도 동대문역사관(1,313㎡), 동대문유구전시장(4,460㎡), 동대문운동장기념관(339㎡), 이벤트홀(2,058㎡), 디자인갤러리(400㎡) 등이 들어섰다. 특히 동대문운동장을 기념하기위해 남긴 야간경기용 조명탑 2기와 성화대도 자리한다.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서울성곽(이간수문, 치성)이 드러났으며, 야구장 및 축구장 부지에선 하도감터를 비롯한 조선전기~후기 건물지유구 44기와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전기~일제강점기 때의 도자류 등 주요 유물 1,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현재는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문화 테마공원이자, 현대의 디자인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전시관 및 행사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1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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