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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힐링 추천 코스

[충남 부여군][힐링 추천 코스] 부여의 연꽃이 잔잔한 백제투어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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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연꽃이 잔잔한 백제투어

궁남지에 피어난 연꽃은 백제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층 더 한다. 부여의 문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과 넓디넓은 능산리 고분의 푸른 잔디는 아이들이 뛰어놓기 좋다. 고란사 유람선을 타고 달리는 백마강의 정취는 더 할 나위 없이 시원스럽다.

출처 : 머물수록 매력있는 충청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21.92km
- 코스 총 소요시간 : 4시간


 




부소산성

부소산성

- 홈페이지 : http://tour.buyeo.go.kr/
http://www.cha.go.kr
* 백제 문화의 보고, 부소산과 부소산성
부여에 들어서면 시가지 북쪽에 검푸른 숲을 이룬 해발 106m 의 나지막한 부소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에는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고란사, 부소산성(사적 제5호), 해맞이하는 영일루, 성충ㆍ흥수ㆍ계백의 백제 충신을 모신 삼충사, 곡식 창고터였던 군창지, 백제 군인의 움집 수혈병영지 발길 닿는 곳마다 발걸음을 붙잡는 토성들, 백제의 역사와 백제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문화를 만난다, 부소산의 유적지]
*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 영일루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 군창지
일명 만리창(萬里倉)이라 불렀던 이곳은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대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이다.
* 수혈병영지
군창지를 조금 지나면 움집이 보인다. 움집은 백제 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복원한 것으로 1m 가량 움을 파고, 사방을 나무나 짚으로 벽을 두른 뒤 초가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원래 움집터와 저장고를 발굴한 곳에 전시실을 지어 구조를 자세히 살필수 있게 하였다.
* 사자루
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뒤쪽에 붙은 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 궁녀사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골로 조금 내려가면 궁녀사가 나온다. 이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1965년에 세웠다.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부여관북리백제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낙화암

낙화암

- 홈페이지 : http://tour.buyeo.go.kr/html
http://www.cha.go.kr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고란사유람선

- 홈페이지 : http://tour.buyeo.go.kr/
*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의 전설을 만난다 *
유람선을 타고 백제역사를 품에 안고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장대, 낙화암, 조룡대, 구드래, 부산•대재각, 자온대,수북정 발길닿는 곳마다, 뱃길 가는 곳마다 백제를 만나볼 수 있다. 백마강은 낙화암, 꽃들이 떨어진 곳. 목덜미 뒤에서 나ㆍ당 연합군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백제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 20년,서기 660년)백제의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스러운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데, 당시 백제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아래쪽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에 더 잘 보이므로 유람선을 이용해 관람해볼 만하다.
* 백마강 주변의 다른 볼거리들 *
백마강을 끼고 좌측으로 펼쳐진 10만여평의 파아란 잔디광장은 군민의 휴식 및 체육활동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수북정 건너로 1만여평의 노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듯 드넓게 펼쳐진 유채단지가 조성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으며매년10월이면700년 백제역사를 재현하는 문화의 표현 백제문화제가 열리고 금년엔 전국유 소년축구대회가 개최되어 황포돛배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선착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면 구드래조각공원이 보이고 부소산과 정림사지, 백제역사문화관, 궁남지, 국립박물관등 문화 유적지가 지척에 있어 황포 돛배여행과 함께 백제고도를 둘러보기엔 더없이 좋은 코스로 부상할 전망이다.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백제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백마강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 흐르고 그위로 눈부시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잔잔한 설레임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 고란약수가 유명한 고란사
조룡대의 슬픈전설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낙화암 절벽 아래 백마강과 맞닿은 곳에 조용하고 단아한 사찰이 하나 보인다.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고려시대 말기에 지어진 절로 백제 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 뒤쪽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해 절이름을 고란사라고 했다.고란사 위쪽으로는 약 50m의 깎아질듯한 절벽이 낙화암을 받치고 있는데 절벽 아래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붉게 한자로 새겨져 있다. 또 강가의 절벽이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왕이 매번 놀고 잔치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지금도 대왕포라고 부를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2) 따뜻한 돌의 전설이 전해지는 자온대
부산을 지나면 황포돛배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서 부여에서 보령쪽으로가는 다리인 백제교 아래로 바위가 하나 있다. 열명은 앉을 정도가 되어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 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이름을 돌석이라 하며 지금은 자온대라고 명명되어 전한다.자온대 암벽위에는 조선조 광해군때 수북 김흥국이 세운 정자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북정’이 자리해 따스한 봄 아지랑이 피는날 부소산과 나성이 보이는 전망에 그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점심식사(솔내음)

- 전화번호 : 041-836-0116
※ 영업시간 11:30 ~ 20:00 (브레이크타임 14:30 ~ 17:30)

연잎떡갈비정식 전문점이다. 정성을 담은 수제 한돈떡갈비와 연잎밥, 계절 반찬으로 이루어진 한상차림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서동공원과 궁남지

서동공원과 궁남지

- 홈페이지 : http://tour.buyeo.go.kr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한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정원으로 백제의 노자공은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정원 조경기술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백제가 삼국 중에서도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관광지이다. 7월에는 천만송이 연꽃들의 아름다운 향연인 서동연꽃축제가 열리고, 10~11월에는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진 굿뜨래 국화전시회가 열려 궁남지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 홈페이지 : 국립부여박물관 http://buyeo.museum.go.kr
* 부여의 문화를 한 눈에 만나는, 국립부여박물관 *
부여시내 남동쪽 금성산 기슭에 위치한 국립부여박물관은 1929년 재단법인 '부여 고적보존회' 가 발족되어 백제의 문화재.유물을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관아의 객사에 전시하게 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의 시작이다.1939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 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70년에는 부소산 남쪽기슭에 새 박물관을 지어 부여지역을 비롯하여 백제권에 흩어진 백제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1993년 8월 6일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하였다. 국립 부여 박물관은 61,429㎡의 면적에 4개의 전시실과 야외유물전시장을 마련하고 약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국립부여박물관의 구조 *
건물 설계 당시 한국의 전통양식을 도입하여 8각형의 중정(中庭)을 중심에 두고 상설전시실인 선사실•역사실•불교미술실과 야외전시실을 배치하였다. 선사실에는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들을, 역사실에는 사비시대의 백제 유물과 삼국시대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불교미술실에는 사비시대 백제의 불교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야외전시실에는 불상과 석탑 등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 홈페이지 : http://www.buyeo.go.kr
http://www.cha.go.kr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때의 무덤들로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한 자리는 이른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점지(占地)된 전형적인 묘지로서의 지형을 갖추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 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거리에 능산리 천이 서류하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이다. 고분은 전열 3기 후열 3기, 그리고 맨 뒤 제일 높은 곳에서 1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은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고분의 분구는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크기는 대형,중형,소형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대형인 전열의 3기는 분구의 직경이 약 25~30m이고, 중형인
후열의 분구는 직경이 약 20~25m이며, 최후의 1기는 분구의 직경이 20m 내외이다.

1호분인 동하총은 장방형현실(玄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이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片麻巖)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다. 석실 바닥의 중앙부에 모전석(模塼石)을 사용하여 길이 238cm, 너비 125cm, 높이 17.5cm 규모의 관대(棺臺)를 만들었는데, 상면을 들고 내부를 보면 당초에는 1인용 관대였으나 뒤에 양측으로 확장하여 2인용 관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2호분인 중하총은 장방형의 석실과 비교적 긴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형식은 터널형이며 벽체는 긴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다. 마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형식을 재료만 벽돌에서 장대석으로 바꾸어 놓은 형식이다. 석실전장은 672cm이고, 현실 길이349cm, 너비 215.1cm, 벽고 130.4cm, 천정고 234.3cm이며 연도 길이 290cm, 너비 112.2㎝, 천정고 126.1cm이다. 3호분인 서하총은 장방형 석실과 비교적 짧은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의 형식은 평사천정이며, 벽체는 거대한 판석 1매로 구성하였다. 이 형식은 7세기경 부여지방에서 크게 유행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석실전장은 471.6cm이고, 현실 길이 314cm, 너비 136cm, 벽고 131cm, 천정고 165cm이며, 연도 길이 131cm, 너비 122cm, 천정고 131cm이다. 4호분인 서상총, 5호분인 중상총, 6호분인 동상총 등은 판석조의 단실묘이며, 천정 형식은 평사천정으로 이루어졌다. 7호분은 장방형석실과 짧은 연도로 된 단실묘이며, 벽체와 천정은 각면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석실전장은 355cm이고 현실 길이 139cm, 너비 62.5cm, 벽고 100cm, 천장고 145cm이며, 연도 길이 55cm, 너비 90cm, 천장고 100cm이다. 능산리고분군은 연대순으로 보면 중하총, 동하총, 서하총 순으로 축조되었다. 중하총을 제일 이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터널형식은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과 6호분의 형식과 같고, 단지 재료만 전에서 돌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분 주인공의 추정은 중하총은 웅진에서 즉위하여 사비에서 사망한 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다음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으로 추정하며, 서하총 이하 평사천정형식은 사비시대 중기 이후에 유행한 형식이므로 각각 시기에 맞는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고분군의 서쪽 200m 거리에서 능사(陵寺)(원찰(願刹))터가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의 출토는 능산리 고분군이 왕실묘지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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