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문화유적 코스 2
영덕의 문화유적지 두 번째 코스다. 평민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무안 박씨 종택 등 고택을 중심으로 대소산 봉수대 등 영덕이 안고 있는 역사 깃든 고즈넉한 유적지 코스다. 경북의 가택양식과 그 안에 잠든 역사를 돌아보자. 뿐만 아니라 영덕하면 떠올리는 영덕대게 어촌마을 체험도 빠뜨릴 수 없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13.69km
- 코스 총 소요시간 : 5시간
신돌석장군생가 및 유적지
- 홈페이지 : http://tour.yd.go.kr
http://www.cha.go.kr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장들은 많지만 신돌석 장군(1878~1908)처럼 약관의 나이에 평민으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조약 다음해인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켜 영해,영덕, 평해에서부터 삼척, 양양, 강릉, 원주, 안동, 영양 등 경북 북동부와 강원도 일대까지 신출귀몰하며 왜군에 저항했던 의병장이다. 이 초가집은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큰 활약을 벌인 장군의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복원되었다. 학생들의 문화 유적 탐방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 신돌석 장군 약력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창의총대장으로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평민이란 이유로 배제되었다. 1908년 11월 18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1971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무안박씨 무의공파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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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골의 북방에 있는 야산을 뒤로 하고 들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지은 옛 집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의공 박의장(1555∼1615)의 넷째 아들 박선이 큰형 박유를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대문채, 정침,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으로 앞면 10칸•옆면 7칸 규모이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침의 오른쪽 뒤에는 박의장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대소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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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영덕 대소산 봉수대는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서울 남산까지 전하던 곳의 하나였다. 남쪽으로 별반 봉수대, 북으로 평해의 후리산 봉수대, 서로는 광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연락을 취하도록 되어있다. 산의 꼭대기에는 방어벽을 쌓고, 성 안에는 직경11m, 높이 3.5m로 봉돈(烽燉)을 쌓았다. 봉수대의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어,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 수량/면적 - 2,826㎡
대게원조 차유어촌체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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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부락으로 죽도산이 보이는 이 곳 앞바다에서 잡은 게의 다리 모양이 대나무와 비슷하다고 하여 대게로 불리워왔다. 마을 내력을 따라 영덕대게원조마을로 명명되었으며 기념표식을 세웠다.『경정리 동명의 유래는 긴 모래불이 있으므로 뱃불 또는 경정이라 하였다. 경정 2리인 수구너미 마을은 11세기 중기(1060년경)에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마을을 순시하던 중 말을 타고 재를 넘으면서 이 마을의 형국을 보고 우마차(牛馬車) 길마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차의 차(車)와 넘을 유(踰)자를 따서 차유(車踰)라 명명하였다 하며, 마을의 형성은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되었는지 미상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지방 관제 개정을 할 때 영해부가 영해군(寧海郡)이 되었는데, 이때 경정리는 영해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로 행정구역을 자의로 폐합할 때 오매동•차유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경정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경정동은 경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경정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마 쪽 : 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
수구너미(車踰洞) : 달부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
오매(烏梅) : 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
대게원조마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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