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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도보 추천 코스

[경북 경주시][도보 추천 코스] 도보로 즐기는 신라의 여름밤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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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로 즐기는 신라의 여름밤

경주 야경의 백미는 유네스코가 경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한 곳 중 하나인 월성 지구다. 월성지구는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내물왕릉, 첨성대,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인 동궁과 월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모두 걸어서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서로 가깝고, 복원 중인 월정교와 교촌마을도 지척에 있으니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11.55km
- 코스 총 소요시간 : 1박 2일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 첨성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이루는 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

 

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절기를 표시한다.

 

하늘의 움직임을 계산해 농사 시기를 정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도 첨성대가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

경주 동궁과 월지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경주 대릉원 일원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 경주 노동리 고분군

경주 중심부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봉황대 남쪽에 있는 식리총은 봉분 높이 6.5m, 지름 30m로 1924년에 조사한 결과 덧널(곽)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임이 밝혀졌다. 내부에서는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과 은제허리띠, 은팔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마구), 옷칠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나 금동관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 (식리)이 발견되었는데, 문양이 독특하고 매우 우수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식리총이라 하였다.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금관, 금제귀고리, 금팔찌, 금제허리띠, 동제신발, 철제솥, 옷칠그릇, 유리그릇,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중 배모양 토기와 기마인물 토기가 특이하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으며, 금관과 장신구의 크기가 작고 순장의 흔적이 보여 신라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경주 노서리 고분군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린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 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조사되었는데,금관과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금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 쌍무덤의 북쪽 무덤으로,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 또한 연대를 새긴 은으로 된 뚜껑이 있는 그릇(은합)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에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51)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쓰여진 동합이 출토되었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상총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마총에서는 말뼈와 안장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노서리 고분군은 노동리 고분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돌무지 덧널무덤과 전기 돌방무덤이 밀집해 두 종류의 무덤 교체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경주지역의 무덤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시청 남쪽 건너편 일대의 고분군이며 미추왕릉(味鄒王陵)을 비롯한 약 250기(基)의 고분이 있으며 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 1973년에는 천마총을 발굴하여 금관 및 천마를 채색으로 그린 백화수피장니(白樺樹皮障泥)가 나와 신라시대회화로서는 유일최고(唯一最古)의 것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지금은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게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또한 고분중에 가장 큰 황남대총 98호은 1973∼75년 사이에 발굴 후 복원하였는데 통일신라 이전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소형석곽분(小形石槨墳)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 경주황오리고분군

경주시내에 있는 평지 무덤들 가운데 동남쪽 황오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시대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1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건물을 지을 때 자주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땅 속에 많은 무덤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된 무덤은 1호분•4호분•5호분•16호분•33호분 등으로, 신라의 일반적인 무덤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을 덮고 흙으로 쌓은 것이다. 황오동고분군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고, 출토유물도 적은편이다.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의 전 단계인 덧널무덤(토광목곽묘)를 비롯 다양한 무덤형식들이 조사되어 경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 경주인왕리고분군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의 동쪽 인왕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10여 기의 무덤들이 모여 있었는데, 황남동이나 노동동•노서동 일대의 무덤들에 비해 규모가 휠씬 작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도굴되었고, 땅 위에 봉분이 남은 것은 1기에 불과하다. 19호•20호•149호 무덤들이 발굴되었는데, 모두 신라의 일반적인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을 덮은 후 흙을 쌓은 것을 말한다. 조사에 의하면 지하에서는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등 작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금동관•금귀고리•은제허리띠•유리구슬 목걸이•굽은 옥 등의 장신구와 말갖춤(마구)•투겁창•은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등 무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연혁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제 허리띠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보문관광단지

경주 보문관광단지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도시전체가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릴만큼 신라 천년의 영화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경주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인 역사도시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이다. 경주보문단지는 경주시가지에서 동쪽으로 약 10여㎞ 정도 떨어진 명활산 옛성터에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보문관광단지는 전지역이 온천지구 및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고 도로, 전기, 통신,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이 완비되어 있으며, 컨벤션시티로의 육성, 보문관광단지와 연계한 감포관광단지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등 국제적 수준의 종합관광 휴양단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경주 보문단지는 총8,000,036m²(242만평)의 대지에 국제적 규모의 최고급호텔, 가족단위의 콘도미니엄, 골프장, 각종 수상시설, 산책로, 보문호와 높이 100m의 고사분수 등 수많은 위락시설을 갖춘 경주의 사랑방이라고 일컫는 종합관광 휴양지이다. 경주지역에는 특히 벚나무가 많다.어느 특정 지역에만 많은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벚꽃천지인 것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4월 개화기때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온통 벚꽃 천지이지만 그 중에서 특히 이곳 보문호 주위와 불국사공원 벚꽃이 한층 기염을 토한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꽃송이가 눈발처럼 날려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경주 보문관광단지는 우리나라 관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그 시절을 넘어 문화와 여가에 눈을 돌리게 된 출발점.

1970년대 ‘관광’에 주목하면서 경주종합개발계획사업이 수립된 이래, 북군동, 신평동, 천군동을 아우르는 240만여 평의 면적에 종합 관광휴양지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되었다.

거대 인공호수인 보문호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따라 특급호텔, 콘도, 컨벤션센터, 레저 및 휴양시설, 테마 관광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16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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