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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힐링 추천 코스

[경북 칠곡군][힐링 추천 코스] 칠곡의 자연과 어우러져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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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자연과 어우러져

팔공산 산자락 골짜기에 쌓은 가산산성을 중심으로 가산바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선돌 신동입석이 서 있는 칠곡의 깊은 산속에 힐링을 떠나자. 소나무가 울창한 송림사 숲길을 거닐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자.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32.08km
- 코스 총 소요시간 : 7시간


 




칠곡 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칠곡 가산산성 및 가산바위

- 홈페이지 : 칠곡군 문화관광 http://www.chilgok.go.kr/tour/main.do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石城)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축조되었다. 가산산성이 있는 곳은 신라시대 오악신앙(五岳信仰)의 중심인 명산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해발 901m의 가산은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일명 칠봉산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산정에 나지막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평지가 있고 여기서 사방으로 7개의 골짜기가 뻗어나가고 있다.
임진, 병자 양란을 겪고 난 후 조선 중기에 전략적 방어를 위하여 약 100여 년간에 걸쳐 축성했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는 선 후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산성으로 내,외,중성 구조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3중성이다. 성내에는 칠곡도호부가 존재했으며, 객사•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보루•포루(砲樓)•장대(將臺) 등이 설치되었다. 정상에는 백여명이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대구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휴식처인 가산바위가 있다.
가산바위는 일명 가암(架巖)이라고도 하는데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바위이다. 상면에 80평 정도의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평지 동쪽에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바위 위에 서면 남쪽으로 대구광역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道詵)이 지기(地氣)를 잡으려고 바위 위 구멍 안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문화재 정보]
- 가산산성
지정연도 : 1974년 3월 26일
시대 : 조선
규모 : 면적 19만 4,436㎡, 외성(外城) 3,754보
중성 602보, 내성 4,710보





송림사(칠곡)

송림사(칠곡)

- 홈페이지 : http://www.songnimsa.org
팔공산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송림사는 절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 계곡에 는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도로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힘들게 산행하지 않아도 팔공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송림사 동쪽으로는 신숭겸 등 고려 태조 왕건의 충신 8명을 추모하고자 이름 지어진 팔공산이 있다. 팔공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불교문화를 꽃피운 영산이다. 북쪽에는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 가산(架山)이 자리하고 있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漆谷)이 되었으며, 1640년(인조 18년)에 이곳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산성 내에 있었다고 한다. 송림사가 있는 마을을 송림이라 하는데, 송림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약 300년 전에 남평문씨가 정착했다고 전한다. 칠곡군 동명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하며, 원래 칠곡군 하북면 지역이나 1914년 구지동, 송림동, 덕산동, 양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명면에 편입되었다. 소나무 숲에서 절이 솟아낫다는 전설을 간직한 송림사(松林寺). 송림사는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싸여 아담하고 옛스러운 멋을 풍기는 절 집과 탑, 석등 등이 아름드리 정원수와 잘 어우러져 마치 작은 공원의 안락함이 느껴진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이 크고 우뚝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를 뽐내는 오층전탑(五層塼塔)이 절의 가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인근에 있는 부인사가 잃어버린 영광의 흔적이라면 송림사는 오로지 탑 하나로 현존하는 영광의 흔적이다. 고려 현종 때 거란과 여진을 퇴치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장경 각판사업을 진행한 것이 부인사에 보관되었던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인데, 몽고의 2차 침략 때 몽고군이 부인사로 들이닥쳐 불태워 버렸다. 이어 송림사에 들이닥친 몽고군의 만행으로 모든 전각들이 불탔지만, 전탑만은 험한 수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오롯이 그 모습을 오늘날까지 지켜온 것이다.

*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송림사오층전탑 *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 전탑(塼塔)으로,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을 이용하여 1단으로 마련하였는데,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탑신(塔身)은 모두 벽돌로 쌓아올렸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
지붕은 벽돌로 쌓은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 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 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비록 모조품이긴 하나,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다.

* 석탑과 유물의 가치에 대하여 *
신라 진흥왕 때 진(陳)의 사신 유사(劉使)가 중국 유학승인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신라에 오면서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 이때 불경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로 그 가운데 일부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 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 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다. 또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 송림사의 볼거리, 석탑과 다양한 유물 *
신라 진흥왕 때 진(陳)의 사신 유사(劉使)가 중국 유학승인 명관대사(明觀大師)와 함께 신라에 오면서 불경 2,700권과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 이때 불경과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절로 그 가운데 일부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한 기원보탑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 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 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다. 또,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 소장 : 송림사 / 시대 : 통일신라 / 종류 : 전탑 / 크기 : 전체높이 16.13m, 기단폭7.3m





신동입석

신동입석

- 홈페이지 : http://tour.chilgok.go.kr
http://www.cha.go.kr
*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선돌, 신동입석 *

신동입석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선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높이가 4.5m, 밑둘레 2m이며 묘의 면적은 897㎡이다. 이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할 때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돌도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임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을 끼고 구릉지에 모여 살던 선사인들이 남긴 유물로 조상신을 숭배하거나 묘지를 표시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선돌의 아랫부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이 새긴 것이다. 선돌의 중앙 부분에는 부러진
흔적이 있는데 원래는 현재의 윗부분도 부러져 셋으로 동강나 있는 것을 보수하여 세웠다.

* 청동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입석 *

입석은 다른 말로 선돌이라고 부르는데,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일반적으로 땅 위에 한 개 또는 몇 개의 큰 돌기둥을 세운 형태를 하고 있는데, 당시 부족간의 경계표시 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기념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경북기념물
지정연도 : 1972년 12월 29일
시대 : 청동기시대
종류 :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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